제1대 그렌빌 남작 윌리엄 그렌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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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그렌빌은 1759년에 태어나 1834년에 사망한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휘그당 총리 조지 그렌빌의 아들이자 윌리엄 피트 더 영거의 사촌으로,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82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윌리엄 피트 더 영거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내무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790년 그렌빌 남작으로 귀족에 올랐으며, 1806년에는 "모든 재능의 내각"을 이끌며 총리를 지냈다. 그는 노예 무역 폐지를 지지했으며, 가톨릭 해방을 추진했으나 조지 3세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야당 활동을 이어갔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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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그렌빌 남작 윌리엄 그렌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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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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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더 라이트 오너러블 |
이름 | 윌리엄 윈덤 그렌빌 |
작위 | 초대 그렌빌 남작 |
출생일 | 1759년 10월 25일 |
출생지 | 워턴 언더우드, 버킹엄셔, 잉글랜드 |
사망일 | 1834년 1월 12일 |
사망지 | 버넘, 버킹엄셔, 잉글랜드 |
안장 장소 | 세인트 피터 교회, 버넘 |
배우자 | 앤 피트(1792년 7월 18일 결혼) |
부모 | 조지 그렌빌(아버지) 엘리자베스 윈덤(어머니)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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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경력 | |
의회 | 영국 |
선거구 | 버킹엄셔(1784년–1790년) |
이전 의원 | 버니 백작 |
다음 의원 | 제임스 그렌빌 |
선거구 | 버킹엄(1782년–1784년) |
이전 의원 | 리처드 올드워스-네빌 |
다음 의원 | 찰스 에드먼드 뉴전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피트 토리당(1801년 이전, 1816년 이후) 휘그당(1803년–1815년경) |
총리 임기 | 1806년 2월 11일 – 1807년 3월 25일 |
국왕 | 조지 3세 |
이전 총리 | 윌리엄 피트 |
다음 총리 | 포틀랜드 공작 |
내무부 장관 임기 | 1789년 6월 5일 – 1791년 6월 8일 |
총리 | 윌리엄 피트 |
이전 내무부 장관 | 시드니 자작 |
다음 내무부 장관 | 헨리 던다스 |
외무부 장관 임기 | 1791년 6월 8일 – 1801년 2월 20일 |
총리 | 윌리엄 피트 |
이전 외무부 장관 | 카마던 후작 |
다음 외무부 장관 | 호크스베리 경 |
인도 통제 위원회 의장 임기 | 1790년 3월 12일 – 1793년 6월 28일 |
총리 | 윌리엄 피트 |
이전 의장 | 시드니 자작 |
다음 의장 | 헨리 던다스 |
무역 위원회 부의장 임기 | 1786년 8월 23일 – 1789년 8월 8일 |
총리 | 윌리엄 피트 |
이전 부의장 | 신설 |
다음 부의장 | 몬트로즈 공작 |
병참감 임기 | 1783년 12월 26일 – 1789년 9월 4일 |
총리 | 윌리엄 피트 |
이전 병참감 | 에드먼드 버크 |
다음 병참감 | 몬트로즈 공작 |
아일랜드 수석 비서관 임기 | 1782년 8월 15일 – 1783년 5월 2일 |
총리 | 셸번 백작 |
이전 비서관 | 리처드 피츠패트릭 |
다음 비서관 | 윌리엄 윈덤 |
기타 정보 | |
칭호 및 훈장 | 초대 그렌빌 남작, 추밀원 고문관(PC) |
친족 (정치가) | 조지 그렌빌(아버지), 조지 뉴전트-템플-그렌빌(맏형), 토머스 그렌빌(둘째 형), 윌리엄 피트(사촌) |
2. 초기 생애 및 가족
그렌빌은 휘그당 총리를 지낸 조지 그렌빌의 셋째 아들로, 1759년 10월 25일 버킹엄셔에서 태어났다[12].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렌빌은 토리당 정치인 윌리엄 윈덤 경의 딸이었다. 그에게는 두 형, 즉 훗날 초대 버킹엄 후작이 되는 조지 너전트-템플-그렌빌과 토머스 그렌빌이 있었다[12]. 따라서 그는 버킹엄과 챈도스 제1대 공작의 삼촌이기도 했다.
1782년 2월 버러 오브 버킹엄 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곧 사촌인 총리 윌리엄 피트(소)의 가까운 동료이자 지지자가 되었다.[17][19] 초기에는 형 조지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있을 때 아일랜드 담당 대신을 맡았고, 이후 육군 지출 담당관, 상무청 부청장 등 여러 직책을 거쳤다.[17][19] 1789년에는 잠시 하원 의장을 맡기도 했으나, 곧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내각에 들어갔다.[17]
그렌빌 가문은 결혼을 통해 피트 가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고모 헤스터 피트, 채텀 백작부인이 윌리엄 피트, 채텀 백작과 결혼했기 때문에, 젊은 그렌빌은 윌리엄 피트 더 영거와 사촌 관계였다.
그는 찰스 시모어, 서머셋 공작의 외증손자였으며, 이를 통해 레이디 캐서린 그레이,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렌빌은 1770년부터 1776년까지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13]. 이후 1776년 12월 14일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80년에 B.A. 학위를 취득했다[14]. 1780년 4월 6일에는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14][24] 1782년까지 수학했으나, 변호사 자격은 얻지 못했다[15].
이튼 칼리지 입학 전후로 부모가 사망했고, 옥스퍼드 재학 중이던 1779년에는 후견인이었던 백부 제2대 템플 백작 리처드 그렌빌-템플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막내아들이었던 그렌빌은 형 조지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15]. 정계 입문 초기에는 형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형은 1783년 말 찰스 제임스 폭스의 동인도 법안 부결 과정에서 국왕에 대한 영향력을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15].
링컨 법학원 재학 시절, 그는 신참 의원이나 정계 진출을 준비하는 이들이 모이는 '구스 트리'(Goosetree's) 클럽에 가입했다. 이곳에서 훗날 총리가 되는 사촌 소 피트를 만났지만, 1782년 말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3. 정치 경력
1790년, 버킹엄셔의 워턴 언더 버니우드의 '''그렌빌 남작'''으로 서임되어 귀족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상원 원내대표가 되었다.[4][13] 1791년부터 1801년까지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라는 격동기에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며[19], 대륙에서의 전쟁 수행을 강조하는 등 피트 내각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6] 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조지 3세 국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때로는 평화 협상을 두고 피트와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7]
1801년, 가톨릭 해방 문제에 대한 국왕의 반대로 인해 피트와 함께 사임했다. 이후 그는 점차 야당 지도자 찰스 제임스 폭스와 가까워졌고, 1804년 피트가 다시 총리가 되었을 때 그렌빌은 폭스와의 연대를 이유로 내각 참여를 거부했다. 이는 피트와의 오랜 정치적 동반자 관계가 끝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4]
1806년 피트 사후, 그렌빌은 폭스를 포함한 여러 파벌을 아우르는 이른바 "모든 재능의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eng)을 이끌며 총리가 되었다.[15][24]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807년 노예 무역 폐지법을 통과시킨 것이다.[24] 그러나 가톨릭 신자의 군 장교 임관 문제로 다시 조지 3세와 충돌하면서 1807년 내각은 총사퇴했다.[15]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동안 그레이 경과 함께 야당 활동을 이어갔으나, 점차 정치적 견해 차이로 휘그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15] 181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으며,[14] 1823년 뇌졸중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24] 그는 일관되게 가톨릭 해방을 지지했으며, 1829년 관련 법안이 통과되자 크게 기뻐한 것으로 전해진다.[15] 1834년 사망했으며, 후계자가 없어 그렌빌 남작위는 단절되었다.[25]
3. 1. 초기 경력 (1782년 ~ 1791년)
1782년 2월, 버킹엄 선거구에서 휘그당 소속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7][19] 버킹엄 선거구는 그렌빌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으로, 사실상 세습 선거구와 같았으며, 윌리엄 역시 형의 지원을 받아 당선되었다.[18][17] 당시 노스 경의 노스 내각 말기였으며 (노스 경은 1782년 3월 사임[20]), 그렌빌은 하원 입성 직후 야당 측에 서서 투표했다.[17]
이후 제2차 로킹엄 후작 내각을 지지했고, 1782년 7월 셸번 백작 내각이 들어서자 9월에는 아일랜드 담당 대신에 임명되었다.[17] 이는 그의 맏형 조지가 아일랜드 총독에 취임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7] 이때 아일랜드 추밀고문관(PC(Ire), 1782년 9월 15일 취임)에도 이름을 올렸다.[19]
1783년 3월 형 조지가 아일랜드 총독직을 사임하고, 4월 폭스-노스 연립 내각이 성립되자, 윌리엄도 6월에 아일랜드 담당 대신직을 사임했다.[17] 같은 해 초, 런던에서 권리 포기법 관련 교섭 중 사촌인 소피트와 가까워졌고, 4월에는 연립 내각 타도를 위해 소피트에게 협력하기로 동의했다.[15]
1783년 12월, 소피트가 수상이 되면서 그렌빌은 그의 오랜 내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월 31일 영국 추밀 고문관(PC)에 임명되었고,[17] 1784년 1월에는 육군 지출 담당관에 취임했다.[17] 1784년부터는 버킹엄셔 선거구에서 선출되어 1790년 귀족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의석을 유지했다.[19]
1784년 3월 상무청 위원이 되었고,[17] 1786년부터 1789년까지 상무청 부청장을 지냈다.[19] 1786년 말에는 귀족 작위를 받는 것을 고려했으나, 하원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여 잠시 보류했다.[17]
1789년 1월, 하원 의장 찰스 울프란 콘월이 사망하자 후임으로 선출되었으나, 임기는 짧았다. 같은 해 6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의장직을 사임했다.[17]
1789년부터 1791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19] 동시에 1790년부터 1793년까지 인도청 장관도 맡았다.[19] 1790년 영국 총선에서 무투표로 재선되었으나, 의회 개회일에 '''그렌빌 남작''' 작위를 받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13] 이 서작은 소피트가 준비한 것으로, 당시 대법관이었던 초대 서로우 남작 에드워드 서로우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13][21] 그렌빌은 서작 자체는 기뻐했지만, 하원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점에 귀족원으로 옮겨가야 하는 상황과 늘어난 책임감에 대해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15] 1790년 귀족원으로 옮긴 후에는 상원 원내대표 역할을 맡았다.
3. 2. 외무 장관 (1791년 ~ 1801년)
1791년부터 1801년까지 장기간 외무부 장관직을 역임했다[19]. 외무 장관 취임 초기에는 외교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1791년 8월에는 시스토바 조약 체결을 환영했고, 1792년 11월에는 영국이 대불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4].
그러나 영국이 프랑스 혁명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그의 입장은 강경론으로 선회했다. 1794년 9월에 쓴 편지에서는 "in the establishment of the French republic is included the overthrow of all the other governments of Europe|프랑스 공화국의 확립은 유럽의 모든 다른 정부들의 전복을 포함한다eng"고 주장하며, "the existence of the two systems of government was fairly at stake|두 정치 체제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eng"는 인식을 드러냈다[24]. 이처럼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초기까지 대프랑스 강경 외교를 주도했으며, 각료회의에서 강화 교섭이 논의될 때마다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당시 외교 문제에 상대적으로 서툴렀던 수상 소피트는 그렌빌에게 크게 의존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렌빌의 강경책은 귀족원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는데, 1800년 초 전쟁 지속 여부를 묻는 동의안은 찬성 92표, 반대 6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가결되기도 했다[24].
외무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국내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1793년 5월 22일에는 인신 보호법 정지 법안(Habeas Corpus Suspension Acteng)을 발의하여 당일 귀족원에서 제3독회까지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795년 11월에는 반역 행위 법안을, 같은 해 12월에는 선동 집회 법안(Seditious Meetings Act 1795eng)을 제출하는 등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입법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24]. 또한, 1799년 3월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의 합병을 지지하며 4시간에 걸친 장시간 연설을 하기도 했다[24].
1801년, 그렌빌은 소피트와 함께 내각에서 물러났다. 이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이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성립된 후, 가톨릭 신자에게도 연합 왕국 의회 의원으로 취임할 권리를 부여하는 문제, 즉 가톨릭 해방 문제를 놓고 국왕 조지 3세가 이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었다[15].
3. 3. 야당 시절 (1801년 ~ 1806년)
1801년, 윌리엄 피트(소)가 가톨릭 해방 문제로 사임할 때 그렌빌도 함께 물러났다[15]. 이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의 합동으로 연합 왕국 의회가 성립되면서 가톨릭 신자에게도 의원 취임 권리를 부여하려 했으나, 조지 3세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15]. 그렌빌은 피트에게 후임 헨리 애딩턴 내각에 대한 야당 활동을 제안했지만, 피트는 "당파를 형성하여 폐하의 정부에 반항하는 것은 죄악"이라며 명확한 반대당 영수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그렌빌은 피트와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반대당파인 "새로운 반대당"을 형성했다. 이는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가 이끄는 "오래된 반대당"과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1804년 1월에는 폭스 등과 접근을 시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뒤처질 것을 우려한 피트 역시 별도로 반대당을 형성하여 애딩턴 정권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결국 애딩턴은 피트의 각외 협력을 얻지 못하고 1804년 5월 사임했으며, 피트가 다시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피트와 소원해진 그렌빌은 새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입각 조건으로 폭스의 참여를 요구했지만[22], 조지 3세는 피트에게 조각을 명하면서 "폭스를 입각시키지 말 것"과 "가톨릭 해방을 주장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로 인해 그렌빌은 입각을 거절했고[15], 피트와의 오랜 우정도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24]. 이후 그렌빌은 폭스와 함께 야당 활동을 계속했다. 피트는 수상 복귀 후 약 2년 만인 1806년 1월 병으로 사망했다.
3. 4. "모든 재능의 내각" 총리 (1806년 ~ 1807년)
1806년 1월 윌리엄 피트가 사망하자, 조지 3세는 후임 총리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3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그렌빌에게 내각 구성을 맡기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이에 조지 3세는 그렌빌에게 총리직을 제안했다.[15][24]
그렌빌은 오랜 정적이었던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파벌의 인물들을 아우르는 연립 내각을 구성했다. 이 내각은 폭넓은 인재 등용으로 인해 "모든 재능의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모든 재능의 내각eng)으로 불렸다. 주요 각료는 다음과 같다.
직책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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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 제1재상 및 상원 원내대표 | 그렌빌 경 (제1대 그렌빌 남작 윌리엄 그렌빌) |
외무부 장관 및 하원 원내대표 | 찰스 제임스 폭스 |
대법관 | 어스킨 경 |
추밀원 의장 | 피츠윌리엄 백작 |
옥새상서 | 시드머스 자작 |
내무부 장관 | 스펜서 백작 |
육군 및 식민지부 장관 | 윌리엄 윈덤 |
해군 본부 제1경 | 하윅 자작 |
재무장관 | 헨리 페티 경 |
병기부 총장 | 모이라 백작 |
영국 및 웨일스 대법원장 | 엘렌보로 경 |
1806년 9월, 핵심 인물이었던 폭스가 사망하면서 내각에 변화가 생겼다. 하윅 자작이 외무부 장관과 하원 원내대표직을 이어받았고, 토머스 그렌빌이 해군 본부 제1경 자리를 맡았다. 피츠윌리엄 백작은 무임소 장관이 되었으며, 시드머스 자작이 추밀원 의장직을, 홀랜드 경이 옥새상서직을 승계했다.
그렌빌 내각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노예 무역 폐지였다. 그렌빌 자신은 1780년대부터 노예 무역 폐지를 지지해왔다.[15] 1806년에는 먼저 영국인이 점령한 외국 식민지에 노예를 공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Foreign Slave Trade Act|해외 노예 무역법eng'을 통과시켰다.[15] 이어서 1807년 1월, 영국 본토와 관련된 노예 무역을 전면 금지하는 1807년 노예 무역법을 의회에 제출했다.[24] 그렌빌은 귀족원 연설을 통해 이 법안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영국이 노예 무역을 금지하면 다른 국가들도 영국의 해상 장악력 때문에 노예 무역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23] 이 법안은 1807년 3월 25일 국왕의 재가를 받아 정식으로 법률이 되었다.[24] 비록 대영 제국 식민지 내에서의 노예 소유 자체는 이후에도 한동안 합법으로 남아있었지만, 노예 무역 폐지는 인권 역사상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노예 무역 폐지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은 윌리엄 윌버포스이지만, 그렌빌 총리가 의회에서 법안 통과를 주도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 현대에 와서 재평가받고 있다.[15]
그렌빌은 또한 가톨릭 해방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다. 그의 아일랜드 정책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의 연합을 둘러싸고 분열된 아일랜드 개신교 세력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동시에 가톨릭교도들에게 일부 관직을 개방하며 가톨릭 해방 운동을 지원하는 방향이었다.[15] 이는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15]
그러나 1806년 영국 총선 이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이 의회에 가톨릭 해방을 직접 청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그렌빌은 가톨릭 해방 지지자로서 이를 외면할 수 없었지만, 이는 가톨릭 해방에 완강히 반대하는 조지 3세와의 정면 충돌을 의미했다.[15] 국왕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가톨릭교도들을 달래기 위해, 그렌빌은 가톨릭교도들이 군대에서 장성급까지 진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15]
하지만 조지 3세는 이 법안마저 승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내각이 가톨릭 관련 문제를 다시는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요구했다.[15] 그렌빌은 국왕의 요구에 따라 법안을 철회했지만, 미래의 정책 논의까지 제한하는 약속은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15] 결국 이 문제로 인해 국왕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고, 그렌빌 내각은 1807년 3월 총사퇴했다.
3. 5. 총리 퇴임 이후 (1807년 ~ 1834년)

내각 붕괴 이후 몇 년 동안, 그렌빌은 그레이 경 및 휘그당과의 동맹을 유지하며 야당 활동을 계속했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비판했다. 1809년 포틀랜드 공작 내각이 무너진 후 그렌빌과 그레이 경을 정권에 참여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811년 초에는 섭정 왕태자가 퍼시벌 내각의 경질을 검토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24]
1809년 포틀랜드 공작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선거에 출마하여, 토리당 소속의 초대 엘든 남작 존 스콧과 제6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셋이 표를 나누어 가진 결과, 그렌빌이 당선되었다.[24] 이로써 그는 1810년부터 1834년 사망할 때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했다.[14]
1812년에는 리버풀 경의 내각에 그레이 경과 함께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그렌빌은 점차 토리당에 가까워졌지만 다시 내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1815년, 그는 친구 찰스 그레이와 결별하고, 리버풀 경의 전쟁 정책을 지지했다.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1817년까지 휘그당 지도자 자리를 그레이 백작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15]
1819년, 랜스다운 후작이 제조 지역의 고통과 불만의 원인에 대한 조사를 위한 동의안을 제출했을 때, 그렌빌은 억압 조치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1823년 뇌졸중으로 사실상 끝났으며,[24] 이후 버킹엄셔의 Dropmore|드롭모어영어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24] 그럼에도 정계에 대한 관여를 계속하여[22], 1828년에는 감채 기금 폐지를 지지하는 팸플릿을 출판하는 등 일정 영향력을 행사했다.[15]
휘그당 지도자에서 물러난 후에도 일관되게 가톨릭 해방에 대한 지지를 이어갔다. 1819년 6월 그레이 백작이 제출한 가톨릭 해방 법안에 찬성했고, 1822년 6월 제4대 포틀랜드 공작의 가톨릭 귀족 법안 논의 시에도 지지를 표명했다.[24] 1829년 로마 가톨릭 신도 구제법이 통과되자 자신의 일생이 "헛되지 않았다"("in vain")며 기뻐했다.[15]
1834년 1월 12일, Dropmore Park|드롭모어 파크영어에서 사망하여 버넘에 매장되었다.[25] 후계자가 없어 그가 가졌던 그렌빌 남작 작위는 단절되었다.[25]
4. 개인 생활
1792년에 초대 토머스 피트(대 피트의 조카 손녀)의 딸 앤(1772년 9월 10일 – 1864년 6월 13일)과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19]
5. 유산 및 평가
그렌빌은 1780년대부터 노예 무역 폐지를 지지했으며[15], 1789년 5월 노예 무역 관련 결의안 변론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연설을 "서민원, 잉글랜드 인민, 나아가 전 유럽의 인민, 그리고 후세 사람들의 감사에 값하는"(entitled him to the thanks of the house, of the people of England, of all Europe, and of the latest posterity영어)이라고 높이 평가했다[24]。 윌버포스의 노예 무역 폐지 운동이 활발해지자, 1806년에는 총리로서 해외 노예 무역법(Foreign Slave Trade Act영어)을 통과시켜 영국인이 점령한 타국 식민지로 노예를 수입하는 것을 금지했다[15]。 1807년 1월 2일에는 1807년 노예 무역법을 제출하고[24] 귀족원에서 법안 지지를 호소했으며, 2월 5일 제2독회에서는 영국 본토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하면 다른 나라들도 영국의 해상 봉쇄 때문에 노예 무역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23]。 이 법안은 통과되어 3월 25일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24]。 비록 노예 무역 폐지의 공로는 주로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의 지도자인 윌버포스에게 돌아가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그렌빌 역시 의회 입법을 통해 노예 무역 폐지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15]。
그렌빌의 아일랜드 정책은 여러 파벌 간의 화해를 도모하여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목적을 가졌다[15]。 그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의 연합을 지지하는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와 반대파 모두에게 균형 잡힌 이익 분배를 시도했으며, 소수지만 가톨릭 신자에게도 관직을 임명하고 가톨릭 해방 운동의 후원자로 활동했다[15]。 그러나 가톨릭 해방 운동 지지는 조지 3세와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행보였다. 1806년 총선 후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들이 의회에 해방 청원을 제출하려 하자, 그렌빌은 국왕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가 군대에서 대장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대신 제출하여 그들을 달래려 했다[15]。 조지 3세는 이 법안의 승인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내각에 다시는 가톨릭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요구했다[15]。 그렌빌은 법안을 철회했지만 국왕의 요구는 거부했고[15], 결국 1807년 3월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수상 퇴임 후 그렌빌은 다시 관직에 오르지는 않았지만[22], 정계에 계속 관여했다. 1807년 총선 과정에서 국왕의 자신 해임을 지지하는 세력이 "토리당", 반대하는 세력이 "휘그당"으로 나뉘면서 그렌빌은 휘그당으로 분류되었다。 1809년 포틀랜드 공작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선거에 출마하여, 토리당 후보였던 초대 엘든 남작 존 스콧과 제6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셋의 표가 나뉘면서 406표를 얻어 엘든(393표), 보퍼트(288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24]。 그는 1809년 12월 23일 법학 박사(D.C.L.) 학위를 수여받고[14], 1810년 1월 10일 총장으로 취임하여 1834년 사망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14][24]。 휘그당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귀족원 표결에서 대체로 당론을 따랐지만[22], 폭스파와는 나폴레옹 전쟁 지속 여부, 가톨릭 해방의 전제 조건, 의회 개혁 등 여러 쟁점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15]。 1817년에는 휘그당 지도자 자리를 그레이 백작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15]。 1823년 마비 증상을 겪은 후 버킹엄셔의 드롭모어(Dropmore)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으나[24], 1828년 감채 기금 폐지를 지지하는 팸플릿을 출판하는 등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15]。 그는 일관되게 가톨릭 해방을 지지했으며, 1829년 로마 가톨릭 신도 구제법이 통과되자 자신의 일생이 "헛되지 않았다"(in vain영어)고 기뻐했다[15]。
그렌빌은 1834년 1월 12일 드롭모어 로지에서 사망하여 번햄에 묻혔으며, 후계자가 없어 작위는 단절되었다[2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그렌빌이 최고의 재능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근면하며 정치 지식이 풍부했고, 온건한 입장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22]。 영국 인명 사전 역시 비슷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냉담한 태도로 인해 인기가 없었으며 성격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덧붙였다[24]。 초대 브룸-보크스 남작 헨리 브룸은 회고록에서 그렌빌의 근면함을 보여주는 예로, 1807년 스코틀랜드 민사 상급 법원(Court of Session영어) 개혁안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연설을 했으며, 그의 스코틀랜드 법 관련 주장에서 오류를 찾아낼 법률가가 없었다고 언급했다[24]。 영국 인명 사전은 그렌빌이 당파적 입장에서는 무정견해 보일 수 있으나, 이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경계심과 강압 정책의 효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해방 문제에 대해서는 두 차례나 직위를 걸고 신념을 지켰으며, 이로 인해 다시 관직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평가했다[24]。
6. 훈장 및 서임
6. 1. 세습 귀족
그는 1790년에 세습 귀족 작위를 받아 귀족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휘그당 의석에 앉았다.[19] 그는 '''버킹엄주 워턴언더버누드의 초대 그렌빌 남작'''(1st Baron Grenville, of Wotton-under-Bernewood in the County of Buckinghameng)이라는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칙허장에 의한 그레이트브리튼 귀족 작위였다.[19] 이 작위는 1834년 그가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소멸되었다.6. 2. 명예직
국가 | 기간 | 서훈 내역 | 약자 |
---|---|---|---|
아일랜드 왕국 | 1782년 – 1834년 1월 12일 | 아일랜드 추밀원 의원 | PC (Ire)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1783년 – 1834년 1월 12일 | 영국 추밀원 의원 | PC |
국가 | 기간 | 단체 | 직위 |
---|---|---|---|
영국 | 1818년 4월 23일 – 1834년 1월 12일 | 왕립 학회 | 회원 (FRS)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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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Bell & 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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